히스토리
누노비키 폭포는 헤이안 시대부터 많은 귀족들과 시인들이 이 지역을 방문하여 여러 유명한 시와 노래들이 비석에 새겨졌습니다.
5개의 폭포 주변 산책로에는 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읊어진 누노비키 폭포 명시 비석 “누노비키 36 가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 하나조노샤라는 시민단체가 처음에 돌 비석으로 만들어 세웠지만 이후에 흩어져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고베시가 순차적으로 복원하여 2007년에 모든 비석을 다시 세웠습니다.
볼거리와 명소
“시절을 견뎌온 누노비키 폭포의 켜켜이 쌓인 하얀 실들, 우연히 이 곳을 찾는 이들을 맞이한다” 후지와라노 유키요시
이사고 다리를 건너 저편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 이 비석 “폭포의 하얀 실”은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를 묘사한 시로, “와쿠라바”라는 일본어는 “우연히”를 뜻합니다. 산을 찾았다 우연히 아름다운 누노비키 폭포를 보게 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시입니다.
“지그시 바라보면 흩어지는 하얀 실에 꿰어진 구슬”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헤이안 시대의 시인으로 롯카센(여섯 명의 대표적인 시인) 중 한 명. 정열적인 일본 시에 능했으며 감정적으로 풍부한 묘사가 두드러집니다.
이 시도 “이세 이야기(이세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것으로 나리히라가 그의 아버지의 영토였던 아시야 마을에 있을 때, 친구와 함께 누노비키 폭포를 보러 왔을 때 읊은 시입니다.
폭포의 물방울이 흩어지는 모습을 실에 꿰어진 하얀 구슬에 비유하여 묘사하였습니다.
“나의 세상이 끝이 나는 것은 오늘인가, 내일인가. 기다림은 잘못인가. 폭포처럼 떨어지는 슬픔의 눈물” 아리와라노 유키히라
좁은 길과 다리의 가장자리. 이 시는 나리히라의 형, 아리와라노 유키히라가 쓴 시입니다. (B : 22번 시).
“이세 이야기 (이세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시로 나리히라와 유키히라 형제가 함께 누노비키 폭포를 방문했을 때 읊은 시입니다.
이 시에서는 슬픔에 잠긴 눈물의 높이를 마치 누노비키 폭포와 같다고 형상화하여 표현하며 삶의 절망감을 표현합니다.
유키히라의 아버지는 유키히라가 왕권 계승 투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여 아리와라 성을 부여하고, 유키히라는 신하가 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나리히라는 지방관료나 중앙관료를 역임하는 등 확고한 성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3m 정도 높이의 누노비키 폭포를 바라보며, 슬픔에 휩싸인 유키히라는 폭포가 마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같아보인다고 묘사했습니다.
폭포를 바라보며 비석에 묘사된 아리와라 형제의 대조적인 감정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하얀 실타래가 흩날리는 누노비키 폭포의 깊은 곳에서 먼 산을 향해 시선을 뻗고 있는 나는 누구를 갈망하고 있는가?”
“아시야 만의 반딧불이와 가마우지들은 초여름의 끊임없는 비를 맞으며 밤새 하늘에 폭풍이 몰아친다” 코토바 인
82대 천황인 코토바 인은 역대 천황 중, 일본 시에 가장 열정적이었으며, 신고킨슈(일본 고대, 현대시 신간집) 편찬에 앞장서 편찬하는 이들을 지휘했습니다.
이 비석에는 누노비키 폭포와 아시야 마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두 편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특징적인 비석
“구름의 경계도 보이지 않는 초여름비에도 자태를 드러내는 누노비키 폭포” 후지와라노 토시나리
긴 돌계단이 합류하는 지점. 이 시의 저자는 고대에는 드물게 아흔한살의 고령까지 살았습니다.
센자이슈 편찬 이후, 가마쿠라 시대에 젊은 세대를 이끌며 시대의 원로로 활약했습니다.
신비로운 아름다움의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여운과 정서가 풍부한 시적 양식의 기반을 마련하여 신 코킨 카후 양식을 등장시켰습니다.
이 비석의 문자는 메이지 시대 선승이었던 난텐보 젠지가 쓴 글자를 새긴 것입니다.
“주인 없이 홀로 널려 있는 하얀 천, 오늘은 직녀에게 빌려줘볼까” 타치바나노 나가모리
이 시는 주인 없이 방치되어 있는 하얀 천(폭포)을 오늘은 칠석날이니 직녀에게 빌려주자는 의미의 시입니다.
온타키차야 근처에 위치한 이 비석은 비석이 돌계단 안에 묻혀 있는 특별한 형태의 비석입니다.
실제로 등산을 하실 때에는 지도와 지도 앱 등으로 정확한 루트를 확인하신 뒤에,
안전한 산행을 즐기시기 바랍니다.